힘이 없는 선의는 공허하다: 낭만적 도덕주의를 넘어서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이 글이 김구의 글이 아니라, 사실은 이광수의 글이라는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여기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소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러한 시각은 과연 국가의 본질이나 실존적 조건에 부합하고 있는가? 국가가 부강함을 꿈꾸지 않는 것이 국가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지닌 생존의 원리와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나면, 국가가 부강함을 추구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가 지향해야 할 최우선 가치는 오직 부국강병뿐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이거나 부국강병을 지향해 있다. 인류 역사상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지 못한 공동체가 존립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국가의 형성과 유지, 그리고 대외적 주권의 수호는 언제나 실질적인 힘—즉 부와 강한 국방력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서만 가능했다. 이를 도외시한 채 문화적 이상주의나 도덕적 우위만을 내세우는 것은, 현실 정치와 국제 역학 관계의 냉혹함을 망각한 순진한 수사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역량이나 평화의 가치 역시, 역설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강력한 국력과 경제적 풍요가 전제될 때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 힘이 없는 선의(善意)는 의도와 상관없이 타국의 침략과 지배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지기 쉽고, 부국강병을 배제한 소박한 자족은 결국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종속을 초래할 뿐이다. 따라서 국가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부국강병이며, 문화의 향유나 인류에의 기여는 그 튼튼한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결과물이지 그 자체가 국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김구의 글이 품고 있는 낭만적 염원에는 감동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현실 인식의 한계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또다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피부로 겪고, 실질적인 국력의 부재가 곧 주권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비극을 몸소 증명해 낸 나라의 국민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뼈저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의 실천적 토대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힘과 부를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고 높은 문화의 힘만을 유독 강조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국제무대에서 생존해야 할 민족에게 또다시 실천적 무능과 낭만적 도덕주의를 심어줄 위험이 크다. 국가가 힘을 기르고 부를 쌓아 스스로를 지켜낼 실력, 즉 현실적인 힘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떠한 고결한 문화적 이상도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식민지 경험이라는 처절한 역사적 교훈을 안고 있는 나라일수록 더욱더 냉철하게 힘의 의지를 불태워야 했음에도, 오히려 이를 경시하고 평화와 사랑의 문화만을 부르짖는다면, 역사의 무거움을 감당할 자세가 온전히 갖춰졌다고 볼 수 없다.
사실 조선의 역사와 문화 속에는 눈부실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품,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 그리고 고결한 선비정신 등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움이 적지 않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고 망국의 비극을 맞이한 것은 우리 문화에 아름다움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미적 성취의 부족이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국가를 지탱할 실질적인 힘—즉 부국강병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극한 아름다움과 고결한 도덕성을 품고 있다 한들, 냉혹한 열강의 각축장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물리적·경제적 힘이 없다면 그 모든 문화적 가치는 한순간에 유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독립과 번영은 공허한 미적 찬가가 아니라, 국가를 지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차가운 현실 감각과 강고한 힘의 축적 위에서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부강함’, 그리고 ‘문화와 힘(Power)’을 분리하여 대립시키거나, 문화가 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조금만 자세히 보면, 이 둘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 전체의 두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움’과 ‘부강함’은 별개의 가치가 아니다. 참된 의미에서 부강(富強)이란 단순히 물적 자원의 축적을 넘어, 한 사회가 지닌 정신적 생명력과 창조적 역량이 물질적 형식으로 구현된 상태를 뜻한다. 반대로 진정한 아름다움은 관념의 유희에 그치지 않고,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서만 비로소 지속 가능성을 얻는다. 이념(Idea)이나 정신적 가치(아름다움)는 현실 속에서 객관화되고 실현되는 과정(부강)을 거치지 않으면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강함이 결여된 아름다움은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성과 같으며, 아름다움을 품지 못한 부강함은 폭력적인 야만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 둘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처럼 서로를 매개하며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문화’와 ‘힘’ 역시 분리될 수 없다. 문화란 단순히 향유하고 소비하는 부드러운 산물이 아니라, 생명체가 스스로를 더 높고 강하게 고양 시키는 근본적인 힘의 발현이다. 힘이 없는 문화는 자기 방어력을 상실한 채 타자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부서지며, 문화가 결여된 힘은 방향성을 잃은 맹목적인 파괴력에 불과하다. 즉, 문화는 그 자체가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의 정신적 힘이며, 물리적·경제적 힘은 그 문화적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는 외적 수단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지닌 생존의 의지다. 둘을 가르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 내면과 외면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생명체의 본질과 생명력 유지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때, 김구의 이러한 시각은 더욱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생명체는 그 근본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복수의 원리를 내면에 품고 있다. 생명은 외부의 침해와 위협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고, 침략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투쟁성을 잃는 순간 이미 생명으로 서의 자격을 잃는다. 복수심이란 악의 형태라기보다는 불의와 침탈에 대한 생명체 본연의 가장 선명한 저항이자, 생존을 향한 의지의 발현이다. 복수심을 잃은 생명은 더이상 생명이 아니라 죽어가는 유기체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는 고백은 이러한 생명 본연의 치열한 투쟁성과 복수심을 스스로 거부하는 유약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당한 고통과 부당한 침략에 대해 분노하고, 그에 응징하는 힘을 길러 복수하는 것은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하지만 가해자를 향한 정당한 복수의 칼날을 거두어들이고, 오히려 "남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도덕적 결벽증에 빠지는 것은 삶의 본질이나 국가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극도로 빈약함을 방증한다. 국가란 도덕 교실이 아니며, 국제정치는 선의의 경쟁장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살벌한 전장이다.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강인한 공동체라면, 부당한 침략을 당했을 때 뼈저린 각성을 통해 힘을 기르고 마침내 그 아픔을 배로 갚아주겠다는 의지—즉 역사의 정의를 관철하는 복수의 의지를 불태워야 마땅하다. 이를 외면한 채 평화와 사랑만을 부르짖는 것은, 결국 생명력을 상실한 자의 공허한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분열적이고 소극적인 시각이 비단 과거의 고문서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다. 냉혹한 글로벌 패권 경쟁과 경제 전쟁이 소용돌이치는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부국강병과 국익 추구라는 냉철한 현실주의보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도덕주의를 미덕으로 치켜세우는 경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실력과 힘을 키워 스스로를 지키려 하기보다, 선의와 평화라는 허상에 기대어 국가의 운명을 타자의 자비에 맡기려는 태도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안팎으로 심각하게 무력화시킬 것이다.
돌이켜보면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걸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역시 바로 이와 일치한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좇고, 국력을 기르는 부국강병의 당위성을 외면한 채 공허한 도덕적 우월감과 쇄국적 안일함에 젖어 있었던 과거의 과오가, 오늘날 이 땅의 정신세계 속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힘을 기르지 않는 선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소의 처절한 울음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과거 조선이 겪었던 치욕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제 감상적인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냉철한 현실 감각과 강고한 힘을 바탕으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망국을 겪은 이들과 그 후예들이 어째서 이토록 뼈아픈 역사의 길을 되풀이하려는 것일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실리(實利)보다 명분(名分)을 우상화하는 구조화된 관성이다. 조선 후기를 지배했던 성리학적 세계관은 도덕적 우월성을 국가와 개인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힘을 기르고 이권을 다투는 부국강병이나 상업적·군사적 실리는 비루한 것이며 선비가 추구할 바가 못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수백 년 동안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생존을 위해 칼을 갈아야 할 순간에도 "대의명분이 바른가", "남 보기에 도덕적으로 떳떳한가"를 먼저 따지는 문화적 관성이 체화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에게 약육강식과 같은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은 곧 도덕적 패배를 의미했기에, 차라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패배(선비의 죽음)를 실리 추구라는 현실적인 승리보다 우위에 두는 기이한 정신적 구조가 대물림된 것 같다.
둘째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 때문이다. 인간의 뇌와 집단 무의식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직시하기보다는 왜곡하거나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조선이 무력하게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뼈아픈 실상은 너무나 참혹해서, 당대인들과 그 후손들은 그 원인을 “우리가 힘이 없고 야만적인 국제정치를 몰라서”라고 인정하기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우월했으나 비열한 무력에 당했을 뿐”이라는 자기 위안적 서사로 포장하려 들었다. 즉, “우리는 침략을 원치 않는 선한 문화강국이었다”는 수사는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패배했다는 쓰라린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한 가장 안락한 정신적 도피처가 된다. 진짜 원인인 무능과 무기력, 힘의 부재를 직시하면 자신의 세계관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무능을 도덕적 순결함으로 미화하는 인지 부조화가 고착화된 것이 아닐까?
셋째는 힘을 기르고 투쟁해야 하는 치열한 책임과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책임 회피와 '피해자 의식'이 주는 편리함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힘을 기르고 투쟁하는 삶은 엄청난 책임과 위험을 동반한다. 내가 강해져야 하고, 생존을 위해 타인과 경쟁해야 하며,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하는 복수와 투쟁의 세계는 고통스럽다. 반면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고 선량했지만 강대국의 음모와 폭력에 희생되었다”는 피해자적 도덕주의는 우리에게 어떠한 실천적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링 위의 파이터가 되어 피투성이가 되느니, 차라리 링 밖에서 “우리는 저들보다 영혼이 맑다”고 외치는 구경꾼이자 도덕적 심판관으로 남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리더들과 그 후예 중 상당수는 이 안락한 도덕적 피해자의 자리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결국 힘을 길러 스스로를 지키는 치열한 생존의 책임 대신 실리보다 명분을 우상화하는 관성, 현실 직시의 고통을 피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 그리고 도덕적 피해자 의식이 주는 편리함이라는 안락한 자기기만 속에 머무는 한, 과거 조선이 마주했던 비극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언제든 다른 얼굴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요즘 특히 그렇다.